'생각 없는 저널리즘'? 언론학자 할 말인가!
상태바
'생각 없는 저널리즘'? 언론학자 할 말인가!
  • 김용민
  • 승인 2021.05.05 10: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방송 진행자 및 출연자는 '자기 생각' 표현말라" 주장 반박하며

“방송에서 오래가는 ‘시사평론가’가 되려면 ‘시사평론’을 해서는 안 된다.”

방송에서 진행자 출연자에게 요구하는 시사평론은 이렇다. 방송할 주제를, 정해진 시간 즉 초 단위까지 맞춰 해설하기를 바란다. 다만 날 선 발언으로써 괜한 논란거리를 제공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울러 방송 5분 전에 호출해도 무례하게 느끼지 않고, 당장 잘라도 아무런 부담이 없기를 바란다. 이런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 10여 년 전 나는 방송사가 원하는 평론만 하겠다며 ‘OEM형 시사평론가’를 자처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역설이 또 있을까? 시사평론가가 시사평론 하지 말아야 한다는 현실이.

진행자가 공정할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면 방송 프로그램의 신뢰도는 담보할 수 없다는 이야기,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그런데 몇 가지 질문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대다수 방송사가 ‘색깔 없는 진행자’를 선호하는가, 또 그런 진행자에게서 이렇다 할 청취율을 기대할 수 있는가, 아울러 이 방송으로 인한 여론 형성 등 사회적 파장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손석희는 언론인의 좋은 사표로 꼽힌다. 그런데 그의 높은 신뢰도는 오롯이 잘생긴 얼굴에, 매끄러운 방송 진행 이력에서만 찾을 수 있을까? 혹시 1992년 MBC 노동조합 대외협력 간사를 맡다가 파업 주동자로 구속돼 수의 입고 수갑 찬사건, 여기서 비롯됐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이미 아나운서로서 대중적 명망을 한껏 가진 그가 일신의 안위 따위는 잊고 언론자유를 위해 온 몸을 던진 태도, 여기서 ‘저 사람이 하는 뉴스라면 믿을 수 있겠구나’하는 믿음이 발원된 게 아니겠는가 하는 점이다. (뒤집어 이때 일로 그를 ‘좌파 언론인’의 근거로 삼는 자들도 있다) 나는 이렇게 본다. 손석희는 (언론자유를) ‘생각’했다. 생각했기에 오늘에 그가 있는 것이다.

1992년 노동조합 파업을 주도했다가 구속된 손석희 MBC 아나운서
1992년 노동조합 파업을 주도했다가 구속된 손석희 MBC 아나운서

어떤 언론학자가 “기자는, MC(소속 직원과 프리랜서 모두 해당)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 글을 동조하듯 공유하는 언론인들도 제법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대상은 언론탄압을 일삼던 정부 당시 치열하게 싸웠던 이들이다. 그 자신들도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민주노총 소속’이라는 정파적 캐릭터로 낙인찍힌 터인데 혼란스럽다) 다만 논의의 대상을 공영방송으로 한정지은 듯 보이는데 수용자 누가 채널, 주파수를 공영, 민간으로 나눠 소비하는가? 게다가 가뜩이나 출연료 노출 및 쟁점화에 부담을 느끼는 진행 및 출연자가 생각과 언사의 자유마저 제약당한다면 어느 누가 공영방송에 나가려 하겠는가? 현실과 유리된 탁상공론일 뿐이다.

잘 몰랐던 바인데 리영희 선생도 '기자의 생각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주장은 맥락 그대로 지금도 유효한가? 어디서 나온 어록인지 몰라도 리영희 선생의 말은 무색무취한 기회주의적 언론인이 되라는 취지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언론이 권위주의적 지배 권력의 나팔수 노릇 하던 그때, 우리만이라도 진실에 준거해 사실을 전하자, 우리가 쓰고 말하는 기사에 애국, 반공 등 특정 신념이나 주의 주장을 섞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 시대가 돌아오지 않는 한, 박물관에서 길이 찬하할 멘트일 뿐이다.

‘생각이 드러나지 않는 방송을 하자’는 말이 나의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비난하기 쉽고’ ‘논란거리가 없는’ 사안에 대해 침 튀겨가며 주장 선동하는 언사는 괜찮다고. 예컨대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목소리가 증거”라는 식의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페미니즘은 괜찮다, 수구 기득권 언론이 만든 ‘대깨문’ 프레임에 걸려들면 피곤해지니 여당에 삐딱한 저널리즘은 괜찮다는 이야기로 풀이된다. 즉 ‘생각이 드러나지 않는 방송’은 기회주의에 불과하다.

누구나 자기만의 미디어를 만들 수 있는 시대, 모름지기 방송 진행자는 사적 미디어 공간에서도 자기 생각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이 주장은 결국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진행자 김어준을 겨냥한 듯 보인다. 김어준 방송을 뭐하러 듣는가? 부정확한 발음, 다른 전문 방송 진행자와 비교해 많이 밀리는 비주얼을 차치하면서 경청하는 이유는 ‘김어준의 생각’ 때문이다. 그의 생각을 소거해 기계적 중립이나 취하게 한다면 그 방송은 더욱 말끔한 이에게 맡기면 된다. 그런데 왜 그 인식이 시대착오적인가? 시대가 변했고 수용자의 기호도 변했기 때문이다. 이런 추이가 정의에 역행하는가?

공정성이 걱정되는가? 김어준 밀어내고 좀처럼 생각이 어떠한지 가늠 안 되는 사람을 세운다고 될 일인가? 해법을 제시한다. 꽤 오래전부터 주장해왔던 바이다. 아침에 편향적 진행자가 있다면 그의 대척점에 서거나, 그가 옹호하는 진영 반대편에 있는 이를 저녁 진행자로 부르면 된다. (아침저녁을 뒤바꿔도 된다) 혹은 경쟁 채널이 차별화전략으로서 동일시간대 반대편 지향의 MC를 세우면 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최측근 한동훈 검사 절친이 때마침 SBS라디오의 아침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가 됐다. SBS가 윤석열에게 줄 댔다는 평가와는 별개로 수용자 선택의 폭이 보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당연히 그 진행자에게도 ‘생각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김어준 사태’의 해법은 이래야 한다.

돌아보니 언론학자와 기성 언론인은 뉴미디어에 대한 공포에 갇혀있다. 새로운 또 도전적 저널리즘의 출현에 대처해야 하는데 참으로 난해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과거의 공식과 기준 속으로 숨는다. 헤어나와 맞설 패기가 없다. 그러나 회피할 일인가? 그래서 백지 위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새 시대에 과연 ‘생각을 소거한 저널리즘’이 가능한가”라고.

수용자를 믿어라. 생각을 쇼핑하게 하라. 왜 점포마다 같은 상품을 팔게 하는가. 즉 수많은 채널, 주파수의 방송에 왜 균질화된 목소리와 양식을 요구하는가. A가 터무니없이 편향되면 B로 옮겨 들을 것이다. 이미 유튜브에서 무한대의 편파방송을 누린 이들에게 ‘아닌 척’ 지상파 방송은 차별성은 고사하고 경쟁력을 상실할 뿐이다. 프로야구 편파방송도 용인되는 세상에 시사만은 구식으로 가겠다? 낡았다. 무책임하다. 비겁하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비트코인 400억 주인공 실존, 그러나 성공담 이면 살펴야
  • 비트코인으로 400억 벌고 퇴사했다는 그 사람은?
  • 타인 ID 이용 백신맞은 국민일보 취재 논란
  • GS리테일 ‘메갈 손가락’ 논란 일파만파
  • "목사 때문에 이별당했다" 추가 제보
  • '남양주' 조응천, 서울은마아파트로 1년새 4억 차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