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노령화되고 있다. 최근 집계된 한국의 고령 인구 비율은 15.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29위이다. 또한 10년 동안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는 연평균 4.4%씩 증가했다. 2048년에는 최고령 국가가 될 흐름이다. 그래서 노인빈곤율이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2018년 기준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43.4%인데, 다른 회원국 평균의 약 3배 수준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40대의 가계 금융자산 중 은퇴자산 비중 즉 노후 생활자금이라 할 수 있는 저축과 투자에 쓴 돈은 126만 원이다. 전체 소득 중 27%에 그친 것이다. 분석대상 국가 중 하위권이다. 네덜란드는 65%를 넘었고, 영국 호주는 55%를 상회했으며, 미국과 프랑스 모두 30%를 넘어섰다. 이대로 방치하면 노인빈곤율은 더 심화할 것이다. 게다가 10가구 중 4가구는 최근 1년간 전혀 노후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단지 게을러서, 미래를 보는 안목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자녀에 대한 과도한 지출로 인해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노후생활을 위협받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자녀에게 쓰는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국가 공공적 부조는 불필요할까? 즉 자녀교육에 대한 공적 분담은 보류해도 될까? 노인 빈곤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기본소득 체계의 확충은 과잉일까?

전 세계가 코로나 극복을 위해 경쟁적으로 돈 풀기에 나서고 있다. 시중에 유동성 즉 현금이 풍부하다. 그래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주식시장에 불이 붙었다. 원자재 시장은 온전할까? 마찬가지다. 구리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1년 새 두 배 이상 뛰면서 중소 제조업체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한다. 그러더니 생활물가도 들썩인다.
이러면 자본 친화적 언론은 “돈을 그만 풀라”라고 하며 코로나19로 인한 현금 풀기에 제동을 걸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국채 즉 나랏빚이 적은 나라이다. 다른 나라는 평균적으로 국채비율이 110%대인데, 우리나라는 겨우 40% 후반대이다. IMF 등은 현금을 더 풀어도 되겠다고 권고한 바 있다. 게다가 원자재 난은 주로 주요 자재 수출국에서 빚어진 일이다.
대외 신용, 인플레 등을 종합 검토해야 하겠지만 이번 원자재 난이 위기 상황에 놓인 국민의 고통을 외면해도 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자영업자 소상공인의 고통을 도외시한 채 거시적 거국적 지표에 매달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금화가 어려운 한시적 지역화폐를 통한 보편지원은 그런 의미에서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4월 25일 ‘법의 날’을 맞아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제안했던 재산비례벌금제를 두고 국민의힘에서 시비를 걸어왔다. 이 지사가 핀란드·독일에서도 재산비례벌금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말하자, 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이 “핀란드·독일은 재산이 아닌 소득에 따라 벌금을 차등한다”라고 지적했다. “‘물을 마신다’라는 말은 잘못됐고 ‘H2O를 마신다’가 맞다”라는 주장에 비유할 수 있다.
재산이든 소득이든 부의 크기에 비례해 벌금을 매기자는 것은, 액수가 같아 실효성이 없었던 벌금 형벌에 따른 고통을 같게 하자는 취지이다. 시대가 변하고 국가보장체계가 정교해지면서 개별 국민의 소득 파악이 쉬워지고 있다. 이미 국가가 작심하면 개인의 소득 파악이 가능하다. 그래서 재산비례벌금제 운용이 불가능하다는 통념은 깨지고 있다. 결국 의지의 문제이다.

조선일보도 역린을 건드리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정쩡한 스탠스로 GS리테일의 손가락 표시 광고 논란을 다루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가장 공정한 관점은 이선옥 작가의 페이스북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추려본다.
“자기들(페미니스트)이 이런 세상을 만들어놓고 인제 와서 ‘백래시’(반동), 표현의 자유 위배 운운하면 반칙이지. (...) 이루다라는 AI한테서도 성 착취를 도출해내는 사람들이 ‘인형한테 무슨 성희롱이냐’고 하면 말이 안 되고, ‘리얼돌 이용하다 강간한다’라는 논리면 ‘남자 인형 성기 만지다가 실제 남자 성기 만진다’라는 논리도 인정해야지.
기안84가 여자 혐오면 랑라리도 여혐이고,(기안은 자의적인 해석이고 랑라리는 남자 혐오 발언이 남아 있지만) 남혐이 사상의 자유면 여혐도 사상의 자유인 거다. ‘보이루’ 쓴다고 여혐일베로 박제했으면, ‘허버허버’든 ‘오조오억’이든 ‘힘죠’든 똑같은 취급 받아도 할 말 없어야 하고, 일베 손 모양이 문제면 메갈 소추 손 모양도 문제인 거다. 페미=메갈=일베는 대중들에게(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혐오 세력으로 동의어다. 페미니즘에 물든 창작자와는 일하지 않겠다는 사과문이 나오는 세상이 됐다.
검열하고 폭로하고, 왜곡하고, 통제하고, 혐의를 만들어 퇴출하고, 해고하고, 좌표 찍어 무릎 꿇리고…. 당신들이 만든 세상 아닌가. 모두의 자유가 같이 침해되고 혐오의 총량이 늘어난 사회, 뻔히 보이는 그 길로 끌고 가놓고 오히려 또 적반하장으로 덮어씌우려 한다.
한 6년 당하다가 이제 똑같이 해주니까 백래시다, 반동이라 하는 페미진영을 보면 참 편리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이제 진보 매체를 필두로 페미니스트 진영은 대대적으로 백래시며 여혐이라는 논리를 들고나올 것이다. 여성이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례들만 편파적으로 뽑아내서 사태를 왜곡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이 공적영역에서 아무리 왜곡해도 대중들은 속지 않는다.
소비자운동의 명분으로 페미진영이 그간 대중문화 영역에서 얼마나 많은 패악질을 저질러 왔는지 기억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걸 여혐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거짓말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도 알고 있다.(마치 혐오를 목적으로 만든 메갈이라는 집단을 미러링을 위해 만들어진 여성운동 세력으로 왜곡했던 것처럼)”

철학자인 윤지선이 2019년 ‘철학연구 127집’에 게재한 “‘관음충’의 발생학: 한국남성성의 불완전변태과정(homomorphism)의 추이에 대한 신물질주의적 분석”이 큰 파문을 낳았다. 유튜버 보겸이 자신의 이름을 갖고 조어한 “보이루”를 두고 실은 여성 성기를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낙인이 이 논문에 담겼기 때문이다. 보겸은 강력히 반발하고는 학술지 발행단체인 철학연구회와 한국연구재단에 항의했지만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김우재 곤충 유전학자는 최근 뉴스토마토에도 관련한 칼럼을 냈다. 요컨대 윤지선 논문은 함량 미달이라는 것이다. “호기심에 논문을 읽으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논문 초록조차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생물학자로, 그중 13년은 곤충을 연구하며 지냈고, 한국 과학자 중에서 그나마 인문 사회과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해온 학자인데, 이 논문의 초록은 독해할 수 없었다. 과학자는 논문을 쓸 때 초록만 읽어도 논문을 이해할 수 있게 훈련받는다.”
논문이나 주장이 어렵다는 것은 주장하고자 하는 바의 논지가 부실하다는 방증이다. 김우재 학자의 짐작도 그러했으리라. “사실 이 논문을 읽는데 곤충학적 지식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윤지선이 이 글에서 의도하는 바는, 철저한 남성에 대한 혐오이기 때문이다. 곤충은 한국 남성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선언하기 위해 윤지선이 꺼내든 비유다. 한국에서 ‘관음충’, ‘한남충’처럼 불특정 다수를 혐오하는 표현으로 자주 곤충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윤지선 논문은 혐오를 가장 현학적이고 장황하게 기술했다는 점 외에는 가치를 찾기 힘들어 보인다는 지적도 칼렘에 담겨 있다. “윤지선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양한 학자들의 권위를 인용해, 한국 남성에 대한 자신의 혐오를 정당화하고 있다. 학자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남성을 ‘불완전변태’에 비유하고자 하는 것은 곧 (여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묘사하고자 하는 듯이 읽힌다. 그러나 곤충 생물학에서는 불완전이든 완전이든 종의 다양성으로 해석한다. 계속 읽어 본다. “그가 곤충을 비롯한 여러 용어를 통해 혐오를 조장하려는 시도는 철학계가 나서 비판해야 한다. 그는 일부러 한남충의 발생과정이 ‘불완전변태’라고 주장하는데, 불완전변태가 완전변태에 비해 열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 진화는 다양성의 증가이지, 진보가 아니다. 윤지선의 발생학과 진화에 대한 사고방식은 19세기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페미니즘 학자인 윤지선이 더 잘 알다시피,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적 사고가 횡행하던 시대에, 여성의 인권은 처참한 상황에 머물러 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철학 논문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윤지선 논문에 대한 학자적 비판은 소거된 듯하다. 페미니즘이 장악한 사회의 일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