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대 열사 30주기,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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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열사 30주기,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 신비롬 기자
  • 승인 2021.04.26 1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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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열사 30주기 맞아 명지대 내 분향소 설치, 추모제 열려
민주화 불꽃의 도화선·· 지금도 이어지는 열사의 정신
명지대학교 본관에 설치된 분향소
명지대학교 본관에 설치된 분향소

[평화나무 신비롬 기자]

노태우 정권 당시 등록금 인상 반대를 비롯해 학내 문제 해결, 사회변혁 등을 위해 투쟁에 앞장섰다 백골단의 폭력에 희생된 강경대 열사의 30주기를 맞았다. 강경대 열사 30주기를 맞아 명지대 내부에는 분향소가 설치됐고, ‘강경대 열사 추모제’가 열렸다.

강경대 후배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진호 씨는 “추모제는 결의의 자리, 투쟁의 자리”라며 “다시 한번 약속하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며 추모제의 시작을 알렸다.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이승무 회장은 “80여석의 의석을 가지고도 정부여당은 부동산 투기에 수구보수 집단과 같이 춤을 추고 있고, 미국은 더 많은 미군 주둔비를 요구하며, 일본은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시도하고 있다”며 “겹겹이 쌓인 역사적 과제 앞에 반드시 우리의 손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갖는 30주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강경대 열사는 어쩌다 민주화의 불꽃이 됐을까. 30년 전 그날을 살펴보자.

 

민주화의 불꽃, 강경대 열사

1991년 2월 명지대학교의 일방적인 등록금 상승으로 사태가 시작됐다. 학생회와 학생들은 등록을 연기하며 대화를 요청했으나 학교는 그 만남을 거부했다. 별다른 수가 없자 학생들은 총장실을 점거하고 무기한 농성에 들었다. 이들은 ‘재단전입금 확충’과 ‘민주적 등록금 책정’이라는 두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그러던 중 1991년 4월 24일 명지대학교 총학생회장이 상명여대 집회 참석 후 학교로 돌아오던 중 경찰에게 불법으로 체포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은 상명여대에서 지지연설을 하고 돌아오던 박광철 총학생회장을 불법으로 연행했다. 총학생회장이 체포되자 김경대 열사를 비롯한 명지대 학생들은 ‘학원 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 대회’를 열었다.

그러자 경찰은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난사하고 백골단을 투입해 무력진압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심각한 타박상을 입고 방치됐다. MBC 보도에 따르면 오후 5시 20분쯤 사복체포 조 대원 4명이 붙잡힌 강경대 열사를 쇠파이프로 마구 때린 뒤 실시한 그를 2M 정도 끌고 가다 길 위에 버려뒀다고 한다. 그 후 학생들이 강경대 열사를 성가병원으로 후송하려 했으나 도중 별세했다.

강경대 열사는 등교 전 “어머니, 아버지, 학교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일찍 돌아오겠습니다. 경대 올림”이라는 글을 남겨 뭇 사람의 마음을 울렸다.

이 사건으로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안응모 씨가 경질됐고, 강경대를 폭행한 것으로 알려진 서울시경 이모 일결, 김모 상경, 장모 상경, 임모 상경, 김모 상경이 구속됐다.

 

강경대 뒤이은 11인의 열사들

강경대 열사의 죽음은 민주화의 도화선이 됐다. 강경대 열사 이후 4월 29일에는 전남대 박승희 열사가 ‘강경대 치사사건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회’에서 분신(焚身)했다. 뒤를 이어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 열사도 ‘공안통치 분쇄,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했다. 이틀 뒤인 5월 3일에는 천세용 열사가 분신했다.

김경대 열사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민주화의 열망은 학교 담을 넘어 사회로까지 번졌다. 5월 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던 김기설 열사가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폭력살인 만행,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며 분신 후 투신했다. 민주화운동 직장 청년연합 회원이던 윤용하 열사도 10일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전남대에서 분신했다. 뒤를 이어 이정순 열사, 박승희 열사, 정상순 열사, 김철수 열사 손석용 열사 등이 분신하며 ‘분신정국’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박창수, 김귀정 열사 두 명이 경찰에 의해 사망했다.

민주화를 위한 열망에도 노태우 정권은 끝까지 저항했다. 노태우 정권은 김기설 열사의 유서를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대필했다며 ‘유서대필사건’까지 조작하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이후 학생들과 시민들의 투쟁 열기는 급속히 냉각됐고, 결국 꺼져버렸다.

 

강경대 열사의 정신 기억할 것

그러나 강경대 열사를 비롯한 열사들의 정신은 지금도 계승되고 있다. 학생들은 지금도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에 앞장서 싸우고 있다. 

명지대는 방만한 운영으로 파산신청을 당했고, 이후에도 △인문 캠퍼스 복합시설 공사비용 미확보 △교직원 및 교수진 임금체불 △정원감축 선고 등 여러 문제로 내홍을 겪고 있다. 이에 명지대 재학 중인 한 학생은 “강경대 열사의 정신을 기리며 끝까지 싸우겠다”며 의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그는 “지금 학교의 상황과 30년 전 학교의 상황이 비슷한 것 같다”며 “이번에도 꼭 학생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고 말했다.

강경대 열사 추모 사업을 진행 중인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학생대표인 지윤경 씨는 평화나무와의 통화에서서 “강경대 열사가 산화한 지 30년이 흘렀지만, 그 당시 외쳤던 구호들이 지금도 실현되지 않은 것 같다. 3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며 “학생 대표로서 열사 정신을 어떻게 실천해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강경대 열사의 외침과 함께하는 학생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데, 30주기를 맞이해 강경대 열사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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