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태일 50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11월 12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MBC 사옥 앞에서는 상암동에서 일하는 방송 노동자들을 위한 작은 문화제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는 “방송비정규직문제 해결하라”, “방송현장, 근로기준법 적용하라”는 구호가 울려퍼졌다. 대구 MBC에서 뉴스자막을 제작하는 배주연 씨는 단상에 올라“프리랜서라는 이유로 야근 수당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프리랜서 계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김한별 방송작가유니온 부지부장은 “방송작가도 노동자”라며 “MBC를 비롯한 대한민국 모든 방송국은 노동을 말할 자격이없다”고 말했다. 1970년 동대문 평화시장이 아닌 2020년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의 풍경이다.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준수’를 외치며 산화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상암동으로 대표되는 방송현장에는 이처럼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과 프리랜서들이 존재한다. 내가 방송작가가 된 건 2003년의 일이었다.
언론사 취업 준비를 하던 나는 공채작가를 뽑는다는 MBC 광고를 보며 방송사에 PD나 기자 외에 방송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나 ‘PD수첩’ 같은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고민 없이 지원했고 필기와 논술, 면접 등을 거쳐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MBC 시사교양국 공채 작가로 합격했다. 대학 졸업 후 스물일곱 살에 얻은 첫 직장이었다.
MBC에 첫 출근 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5월 1일, 노동절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정 휴일에 첫 출근을 하라는 지시가 의아했지만, 방송현장의 특수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왠지 모르게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 다르게 MBC는 텅 비어있었다.
담당 PD에게 물었다 “왜 노동절에 출근하라고 하셨어요?”
그가 말했다 “노동자가 아니니까”
그리고 이런 질문이 덧붙여졌다. “공채 작가라고 하니까 비단길을 상상했을 텐데 앞으로 자기 앞에 놓인 건 가시밭길 일거야. 그런데도 할 수 있겠어?”
그의 말은 족집게 예언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정말 죽도록 일을 해야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더러는 새벽에 심지어 밤을 새며 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이템을 찾고 섭외를 하고 촬영구성안을 쓰고 PD가 촬영해온 테이프에 담긴 내용을 옮기고 자막을 뽑고 예고안을 쓰다 보면 새벽 1-2시가 훌쩍 넘었다. 지하철과 버스가 끊긴 시간이다 보니 집에 가려면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여의도 MBC에서 우리 집까지의 택시비는 심야 할증 기준 2만3천원. 택시미터기를 보며 집에 가는 내내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당시 나의 한 달 월급은 150만원이었다.
그나마 공채 출신이라고 더 많은돈을 받았다. 나보다 먼저 일을 시작한 작가들은 나와 같은 일을 하면서 이보다 적은 120만 원을 받았다. 나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광고 수입도 많고 직원 월급도 높은 MBC가 작가들에게 왜 이러는 걸까? 선배에게 묻자 깊은 한숨과 함께 이런 답이 돌아왔다. “외주 작가들은 한 달에 6-70만원 받아. MBC에서 일하니까 너는 그나마 2배 넘게 받는 거란다”
고단했던 현실과 달리 방송 일은 재미있었다. 내가 하루에 몇 시간을 일하고 얼마를 받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는 아직 배우는 입장이라 처우가 안 좋은 게 당연하지만 메인 작가가 되면 아주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왔다. 하지만 내 주변의 메인 선배들은 늘 피곤에 찌들어있었고, 디스크를 앓고 있었으며, 원고료가 너무 적다며 푸념을 하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을 일하던 어느 날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증세가 생겼다. 병원을 찾아 증상을 말하자 의사가 물었다.
“요즘 잠을 잘 못 주무세요?”
“네”
“얼마나 못 잤는데요?”
“한 사흘 정도 밤을 샜어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한참 쳐다보던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흘이나 밤을 새면 누구나 다 그래요. 그렇게 일하지말라는 몸의 신호죠”
하루 이틀 푹 쉬면 괜찮아진다, 오늘은 수액을 맞고 가되 꼭 일찍 자라고 그가 말했다. 이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일하다 죽어도 프리랜서인 나는 산재 처리도 안되겠구나’ 일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해봤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될 것만 같았다. 대신 나는 이튿날 월 2만원짜리 생명 보험에 가입했다. 혹시라도 딸이 과로사하면 슬퍼할 엄마를 위해 보험료라도 준비해야 했다.‘
이렇게 살다가 딱 죽겠구나’ 싶던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와 영등포 인근의 고시원에 들어갔다. 창문 없는 방 월 23만원, 창문 있는 방은 월 30만 원. 죽도록 일해 번 돈을 택시비로 날리느니 여의도 인근의 고시원에 사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이었다. 심지어 하루 1~2시간은 더 잘 수 있지 않은가!
나와 같은 생각으로 고시원 생활을 하는 작가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만두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10명에 달하던 공채 작가들은 대기업으로, 은행으로, 병원 홍보실로 뿔뿔이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그만둘 수가 없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방송 일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좋은 방송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꿈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게 벌써 18년 전 얘기다.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종진 박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공공부문 지역 지상파와 비지상파 15곳의 비정규직(47.6%,2470명)과 프리랜서(28%, 1452명) 규모는 전체 인력(5181명)의 75.8%에 달한다.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외치는 공공부문의 방송사라 해도 정규직이 10명 가운데 2명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프리랜서 10명중 7명은 여성이고, 특히 20대와 30대 여성이 75%를 차지하고 있다. 18년 전 내가 처음 방송 일을 시작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방송 콘텐츠는 여전히 청년, 특히여성 비정규직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제작되는 셈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마법은 바로 ‘프리랜서’라는 단어에 있다.
‘프리랜서 방송작가’라고 하면 무엇이 연상될까? 자유롭게 재택근무를 하고 카페나 집필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켜고 우아하게 집필활동을 하는 걸 상상하기 마련이지만 현실은 사뭇 다르다. 지난해 방송작가유니온이 전국의 방송작가 580명을 상대로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방송작가의 93.4%가 프리랜서 형태로 고용되어 있지만 72.4%는 방송사나 외주제작사로 출·퇴근하며 상근 형태로 일하고 있었다. 주 40시간 이상 일한다는 응답도 63%에 달했지만 시간 외 수당을 받는 사례는 2.8%, 퇴직금을 받은 사례는 1.8%에 불과했다. 4대 보험에 가입돼 있는 사람은 3.1%에 그쳤다. 방송사로 출퇴근하며 주 52시간을 넘게 일해도 시간 외 수당이나 퇴직금, 연차는 커녕 4대 보험 적용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 상당수는 20~30대 젊은 여성이다. 이런 현실을 바꾸려고 지난 2017년 11월11일 방송작가유니온 즉 전국언론노동조합방송작가지부가 출범했다. 2001년 방송 사상 최초로 대구 마산 지역 MBC 작가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다 전원 해고당한 이후로 16년 만의 일이었다.
광화문에서 들던 촛불을 이제는 내 일터에서 들자는 다짐이었다. 당시 출범선언문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국민에게 기쁨 주는 방송 콘텐츠가 방송작가 및 비정규 노동자들의 눈물로 제작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그렇다. 그 시작은 작가들 스스로 우리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드러내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방송작가유니온이 존재하는 이유다.
이윤정 (TBS 작가 / 방송작가유니온 전 부지부장)